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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갯길 넘어가니 ‘할머니 점방’이 있었네.


"고갯길 넘어가니 ‘할머니 점방’이 있었네"
,문경근칼럼>'귀양실 고갯길' 을 걷다.
2010 년 12 월 18 일 토18:12:26 문경근주필

   
▲ 길에 인생을 묻다
옛길이 둘레길이나 올레길이라는 이름으로 요즘 인기 아이콘이 되고 있습니다. 따뜻한 이야깃거리가 있을 법한 이름들입니다. 예로부터 사람 사는 곳엔 길이 있기 마련이고, 그 길은 오가는 사람들이 떨어뜨렸을 크고 작은 사연들로 인해 정겨운 길이 되나 봅니다. 
엊그제는 지인들과 어울려 시내에서 구룡마을에 이르는  ‘귀양실 고갯길’을 산책하듯 마실가듯 걸으며 여유로운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 문경근주필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가 했더니, 곧바로 아담한 암자와 허름한 민가들 사이로 좁다란 길이 보입니다. 잠시 후 나지막한 산자락 사이로 본격적인 고갯길이 나타납니다. 잠시 숨을 돌리며 뒤를 돌아다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티고 있던 시내의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일시에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고갯길은 삭막한 겨울 산을 좌우로 가르듯,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구불구불 이어집니다. 물기를 온전히 날려버린 나뭇잎들이 발아래 밟히며 바스락거립니다. 걸친 것들을 남김없이 떨어낸 나무들은 오히려 가뿐하며 짱짱해 보입니다. 그들은 내공의 힘으로 차디찬 바람과 맞서며 의연하게 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름 모를 산새 서너 마리가 감나무 끝에 매달린 까치밥을 쪼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할 터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여유로운 몸짓들입니다. 엄지만한  새들은 사람이 반가운 듯 촐랑거리며 나무 사이를 나돌아 다닙니다. 
소나무들은 여전히 의연한 초록빛을 유지하며, 산은 겨울에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 늦은 하얀 꽃을 아직껏 매달고 있는 쑥부쟁이 하나가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안쓰러운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작고 하찮은 꽃 덕분에 삭막한 고갯길이 길에 잠시나마 온기가 감돕니다. 
이런저런 모습들에 나그네의 느긋한 한담까지 끼어드니, 겨울 산은 멈춰 있는 듯 움직이는 ‘정중동(靜中動)’을 연출합니다. 

한참 동안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채소의 잔해들이 널려 있는 밭이 나타납니다. 마을이 가까웠다는 신호입니다. 이내 집들이 옹기종기 정답게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시내버스 승강장이 있는 걸 보니, 자그마한 점방 하나쯤은 있을 법 합니다. 
일행 중 한 명이 출출하다는 핑계로 막걸리 얘기를 꺼내더니, 이내 허름한 점방을 찾아냅니다. 삐걱거리는 출입문을 여니, 진열대 위에 쌓여 있는 과자봉지와 생활용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벽에는 음력도 나와 있는 커다란 달력이 마지막 한 장을 매달고 있으며, 그 옆엔 때 묻은 주민 전화번호표가 붙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점방이 먼 옛날의 추억을 건드려 깨웁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인정 많아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방문을 슬며시 열고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어린 시절 고향 할머니들의 모습이 언뜻 스쳐갑니다. 주인이 장에 가! 대신 지 키고 있으니, 필요한 것 있으면 알아서 찾아 먹으랍니다.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는 시종 앉아 있었지만, 표정만으로도 친절하고 정이 넘칩니다. 마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놓이고 아늑한 분위기에 젖은 우리 일행은, 구석진 곳에서 막걸리 한 병을 찾아내고 김치와 젓가락도 알아서 챙겼습니다. 
촌티 나는 셀프 서비스와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주름진 미소로 점방 안이 훈훈해집니다. 우리 일행은 마치 어리광 부리듯 한동안 할머니와 야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할머니는 계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남의 집이라 값을 잘 모르니 돈은 알아서 놓고 가라 합니다. 

점방을 나서는 나그네에게 정겨운 손을 흔들어주는 할머니가 또 한 번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막걸리 한 잔에 인정까지 덤으로 얻어서인지, 되돌아오는 고갯길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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