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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하찮은 잔재미'의 재미

         '하찮은 잔재미'의 재미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참 많다면서 살만하다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남이나 세상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눈으로 들여다보면 우리 주위엔 옹골진 재미 말고도

아기자기한 잔재미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운동 삼아 나가는 산책길은 때로는 무료하기도 하지만, 가벼운 잔재미와 함께 하면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자주 다니는 산책길은 주변에 산과 내와 들이 고루 자리 잡고 있으며,

길가에는 갖가지 풀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끔 발에 채이기도 하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널려있는 것이 강아지풀입니다.

그만그만한 크기지만 그 중에도 훌쩍 솟은 강아지풀 줄기 하나를 뽑아들고

만지작거리며 걸으면 허전함이 좀 덜 합니다.

그러다가 줄기 밑동을 엄지와 검지로 비벼대면 강아지 꼬리 모양의 꽃 이삭이 비틀며 빠른 춤을 춥니다.

흡사 강아지가 꼬리를 자발스럽게 흔드는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강아지풀의 특성이나 성장 과정을 생각하는 것은 허튼 일입니다.

그냥 그 상태로의 잔재미를 맛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다보면 그 하찮은 강아지풀이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를 손 안에 슬며시 쥐어줍니다.

꽃 이삭을 올려놓은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면 손가락 끝 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방향을 돌려놓고 흔들면 손목까지 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모양을 보며 깔깔대며 재미있어 했던 그 시절.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뒤통수에 대고 살짝 문지르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던 친구.

장난삼아 혀 위에 올려놓았다가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 눈물이 나도록 캑캑거렸던 일.

생각해보면 그 작은 풀에 얽힌 추억도 가지가지입니다.

손에 쥐고 잔재미를 즐기던 강아지풀이 시들해진 걸 보니 꽤 걸은 듯합니다. 냇물을 향해 가볍게 던졌더니,

잠시 포물선을 그리다가 풀숲에 처박힙니다. 마침 쉬고 있던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깜짝 놀라 하늘로 치솟습니다.


몇 걸음 더 가자, 풀 사이를 비집고 자리 잡은 콩 한 포기가 엊그제 내린 비 덕분에 제법 탐스럽게 자랐습니다.

지나치는 길에 손을 뻗으니 아기 손바닥만한 콩 이파리 하나가 잡힙니다.

나는 걸음을 멈출 필요도 없이 또 하나의 잔재미를 시작했습니다.

작은 계란 하나를 움켜 쥔 기분으로 왼손을 가볍게 오므리면 엄지와 검지 위로 자그마한 구멍이 만들어집니다.

그 위에 이파리 하나를 올려놓고 살짝 누른 뒤 오른쪽 손바닥을 펴 재빠르게 내리칩니다.

그 순간 연약한 이파리는 '딱'소리를 내며 자기 몸을 찢깁니다.

터질 때의 손가락을 간질이는 감각과 경쾌한 파열음이 주는 잔재미가 여간 아닙니다.

이런 동작을 몇 차례 반복하다보면 이파리마다 주는 느낌이 미세하게 다름도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이파리의 크기와 내리치는 압력과 속도가 제대로 맞아 떨어졌던 가 봅니다.

'뻥'하며 터지는 소리에 지나가던 한 젊은이가 멈칫하더니 신기한 듯 쳐다봅니다.

요즘은 산책로까지 점령한 칡넝쿨 이파리가 콩 이파리에 버금가는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부터는

이들을 번갈아 사용하기도 합니다.


나의 산책길 잔재밋거리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간간이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의 이파리를 한 줌씩 훑어 공중에 뿌린 뒤

맴돌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걷는 잔재미도 있습니다.

흩어 뿌리는 높이와 각도에 따라 이파리끼리 몸을 부비며 떨어지는 모양새도 달라집니다.

어렸을 때 소나무와 잡목이 무성한 뒷산에서 숨바꼭질을 하면서, 아카시아 이파리를 사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먼저 아카시아 이파리를 양쪽 호주머니에 빵빵하게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숨기러 가는 오솔길에 이파리를 듬성듬성 떨어뜨려 두는 것입니다.

술래에게 그 아카시아 이파리들은 마치 어둠 속의 희미한 등불과도 같은 길잡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작정 뒷산 속을 헤맬지도 모를 술래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산책길에 그냥 쌩쌩 걷는 것보다 이런저런 잔재미를 맛보며 걸으면 몸도 기분도 더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하찮은 잔재미'의 재미는 그걸 해본 사람만이 그 아기자기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 2008년 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