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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이야기/*********은백빛

깨북장이 친구의 부름을 받고

        깨북장구 친구의 부름을 받고

 

요 며칠 동안 장마가 계속되고 있는데, 오늘도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비를 뿌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무료한 토요일 오후를 빈둥빈둥 보내고 있는데, 국민학교 동창생인 길주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문 선생, 비도 오고 촐촐한데 소주 한 잔 어때?"

  "좋지! 누구의 부름인데."

  나는 두말없이 오케이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서 자랐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똑똑하고 정이 참 많았습니다.

60년이 넘도록 허물없는 소통을 유지하고 있는 소위 깨북장구 친구이자, 씨동무입니다.

학교를 다니고 성장하며 나이를 먹는 과정을 서로 훤히 보아 왔으며, 지금도 끈끈한 우정은 옛날 그대로입니다.

깨북장이를 만나 정담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특히 오늘같이 비 오는 날엔…….


어릴 때부터 나는 비 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비가 잠시 멈추는 틈을 타서 우리 집 뒤편에 있는 논두렁에 가보면 간간이 물이 넘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토실토실한 송사리들이 튀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무신짝을 벗어 재빠르게 퍼 올리면 운이 좋을 땐 몇 마리씩 걷어 올릴 수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미꾸라지가 물길을 따라 마을 안 고샅길의 고랑까지 올라오기도 합니다.

나는 움켜쥐려고 실랑이를 하고 그 놈은 빠져나가려 버둥대지만, 결국은 슬며시 놓아주고 맙니다.

소나기가 멈추면 잠시 햇살이 비치다가도 어느 샌가 두승산 너머 남쪽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한참 후엔 어김없이 소나기가 퍼붓습니다.

학교에서 비가 생기는 과정을 배우기 전까지는 두승산이 소나기를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뜀박질로 숨을 헐떡이며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으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후드득 소리를 내며 마당에 구멍을 뚫기라도 할 기세로 쏟아집니다.

초가지붕을 타고 내리는 집시랑 물이 시야를 가릴 정도에 이르면 큰 비라고 짐작을 합니다.


오늘 유달리 어렸을 때의 비 오던 날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은 우중에 깨북장구 친구의 부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 장소에 가보니 미리 와 있던 동창생 네 명이 반갑게 맞이합니다.

  "잘 지냈는가? 다들 건강하지?"

  "갱근이, 신수가 훤한 걸 보니 좋은 일 많은가 보네."

주고받는 인사말과 악수하는 손길에는 묵은 정이 묻어납니다. 우리끼리는 언제 만나도 늘 그렇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금세 어린 시절의 말투로 돌아가, 스스럼  없이 '인마전마' 소리도 오갑니다.

요즘은 동창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애틋한 정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백여 명의 국민학교 동창생들 중 대부분이 서울을 비롯한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현재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서른 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해방 직후 혼돈기에 태어난 우리 또래들은 알고 보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네댓 살 무렵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에 6.25전쟁을 만나,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니며 용케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허기에 지친 앙상한 몸에 배만 불룩 내밀고 고샅을 쏘다니면서도 숱한 전염병을 끄떡없이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여름의 끝 무렵부터 뇌염이라는 전염병이 떠돌게 되면, 소위 뇌염방학까지 마쳐야만 안심하고 학교에 갔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몹쓸 병마에 걸려들지 않고, 허기를 견뎌낸 세월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안고 오늘까지 건재한 동창생들.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철이 좀 드는가 싶으면 고향을 떠나 서울 행 열차를 탔던 동창생들도 참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님을  등졌던 그들의 마음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어른 몫을 하며 살고 있으니, 진감래(苦盡甘來)인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지 않았던가!

요즘 국민학교 동창생들 자주 보고 싶다는 것이 동창생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입니다.

동심처럼 순수해지면서 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 역시 그러합니다.

동창생들의 얼굴에 새겨진 굵은 주름과 성긴 머리카락 사이로 나이의 흔적이 완연하지만, 어딘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입니다.

식사가 끝나면서 우리들은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겁게 살자고…….

그리고 건강관리 잘 하며 아프지 말자고…….

                                                                                                                    ≡ 2009년 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