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반전
지난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외출할 일도 없는데다 딸네 집에 간 아내도 내일 온다하여 나는 자유로움에 젖어 있었습니다.
반바지와 러닝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 리모컨이나 운전하고 있기엔 딱 좋은 날입니다.
부끄럽지만 이런 상태가 게으르고 볼썽사납게 늘어진 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집안일은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몸에 좋다는 허깨나무 조각도 몇 개 넣었습니다.
몸이 편하면 잠이 오기 마련.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는 순간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잠시 남편의 반찬 걱정을 하더니만, "비 오기 전에 산책이라도 다녀오세요." 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습니다.
마치 이곳 날씨와 내가 퍼져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내의 말이 백번 맞습니다.
허깨비 같은 텔레비전에 매달려 있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건강을 위해 백번 좋은 일일 테니까요.
나는 잠시 미적거리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단골 걷기운동 코스인 자전거도로로 나갔습니다.
자전거는 어머니께서 작년 가을에 경품으로 타신 걸 내 생일 선물로 주신 것이라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전거도로는 정읍천 상류를 따라 내장저수지 틱 밑까지 나 있는 길로, 왕복 이십 리 남짓에 주변의 풍광 또한 일품입니다.
상쾌한 바람결이 스쳐갈 때마다 몸 안에 쌓인 몹쓸 것들이 빠져나가며,
마음속의 나쁜 찌꺼기들도 따라 나가는 듯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이 길에서 자전거 타는 일을 특별히 좋아합니다.
운동 나온 사람들이 간간이 스쳐가기도 하고, 고개를 쳐들면 내장산 써래봉이 손에 닿을 듯 다가섭니다.
냇가에는 갖가지 물풀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으나, 가뭄 때문에 물의 양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이름모를 물고기들이 물길을 거슬러 오르려고 몸짓을 해보지만, 나지막한 보마저 넘어가기가 힘겨워 보입니다.
왜가리 한 마리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지만 그리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아기원앙 새끼 네 마리가 마실을 나왔는지 쪼르르 몰려다니지만 아직 걸음걸이가 불안합니다.
며칠 전에 이 근처에서 어미 원앙을 본 일이 있습니다.
부근에 어딘가에 어미가 있을 터인데, 한참을 머무르며 기다려 봐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자전거가 따르릉 소리를 내보았지만, 아주머니 세 분은 수다에 몰입하느라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이 길을 온통 수다로 깔아 놓을지도 모르지만, 사람 사는 향기가 느껴져 좋습니다.
절반쯤 달려와 휴게코너에 자전거를 받쳐놓고 다시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웅대한 내장산 자락이 가로막듯 다가서며 풋풋한 산 냄새를 내뿜습니다.
그때 불현듯 텅 빈 집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아무런 연상의 끄나풀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가스 불 위에 얹어놓은 물주전자가 머리를 때리더니, 그 순간 주변의 물길도 산자락이 움직임을 멈추는 듯했습니다.
가던 길을 서둘러 되돌아선 나는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받쳐둔 자전거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페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밟았습니다.
불을 켜놓은 지 두 시간을 넘겼으니,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물이 모두 닳아진 것은 물론일 테고, 주전자도 바짝바짝 타며 시커먼 연기를 문틈으로 내뿜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발 그 정도에 멈춰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화재로 이어진다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아파트가 가까워지면서 주방의 창문을 먼저 보았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연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불렀을지도 모르는 소방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내버리듯 팽개치며 한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주방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다행히 시커먼 연기도 타는 냄새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주전자의 주둥이는 주인을 원망하듯 마지막 수증기를 사납게 내뿜고 있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약 삼아 넣은 허깨나무 조각은 졸아서 형체조차 없어졌으며,
빨갛게 변한 물은 서너 숟갈이나 될까 말까 했습니다.
가스불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뜻밖에 중불보다 조금 낮은 수준으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무심결이었지만 가스렌지 손잡이를 어정쩡하게 멈춰두었던 내 손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로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주방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사고 문턱까지 가게 된 근원은 나의 경솔함과 건망증입니다.
가던 길은 여유로 가뿐했었는데, 되돌아오는 길은 급박한 상황으로 반전되었던 그날의 반나절!
참으로 부끄러운 반전이었습니다.
≡ 2007.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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