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미니농장의 특별한 행복
올해도 학교의 빈터를 손질하여 자그마한 채소밭을 만들었습니다.
푯말은 '흙사랑체험장'이라고 세워놓았지만, 선생님들에게 무공해 청정 채소를 맛보게 하는 미니농장의 역할도 합니다.
우리끼리는 '돋을볕웰빙농장'이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돋을볕'은 아침에 해가 솟아오를 때비치는 햇볕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며,
우리 학교의 교지 이름이기도 합니다.
즉, '돋을볕웰빙농장'은 따사롭고 깨끗한 아침 햇볕의 기운을 받으며, 몸에 좋은 청정 채소를 가꾸는 농장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삼십 평 남짓으로 그 규모는 보잘 것이 없지만. 이름만은 전국적 브랜드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좋은 이름이 자성예언(自成豫言)이 되어,
이름의 의미처럼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기대도 있습니다.
이 미니농장은 애당초 수지 타산이나 이윤 추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시작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화학비료와 농약은 거부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그 결과로 손수 기른 싱싱한 채소를 오붓이 둘러앉아 먹는 것이야말로, 이 미니농장이 성공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나는 4월부터 틈틈이 삽질도 하고, 잡초도 뽑으며 제법 공을 들였습니다.
땅을 파보았더니 푸석푸석하니 촉촉한 맛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봄 가뭄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소에 사람들이 너무 무심했던 탓도 있습니다.
흙도 사람처럼 손길이 뜸하면 이렇게 아픈 치레를 하는 모양입니다.
학교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땅이라 척박하기 짝이 없지만,
무공해 웰빙이라는 이름값을 위해서라도 대충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채소 농사 경험이라야 젊은 시절 시골에 살 때, 텃밭에서 부모님을 거들면서 익힌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전혀 생둥이는 아닙니다.
수년 전에 근무한 학교에서도 빈 땅에 가꾼 풋고추를 한 줌씩 따서,
점심시간이면 선생님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의 경험을 갖고 채소 농사에 관해 큰 노하우라도 있는 듯 으스대며 선생님들을 부추겼습니다.
대부분의 젊은 선생님들은 채소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데는 전혀 무지하거나
서툴기 짝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지 그들을 구슬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미니소농장이 잘만 되면 엄청 많이 생산될 터이니, 학교에서도 무공해 채소를 싫증나도록 먹고 집에도 싸들고 갈 수 있어
올 여름 채소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영리한 선생님들이 나의 가당치도 않은 과대 선전에 넘어갈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냥 해본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무비료, 무농약, 청정 등의 키위드에 공감한 듯하더니,
웰빙이라는 말엔 껌뻑 넘어가는 것도 같았습니다. 물론 내 생각이었지만…….
비록 손바닥만한 미니농장이지만,
그래도 담당자가 있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으로 초보 일꾼으로 젊은 정 선생을 유인했습니다.
웰빙농장장이라는 거창한 직함까지 부여했더니, 모두가 웃음과 박수로 동의해주고 당사자인 정 선생도 비시시 웃었습니다.
물론 재미있자고 붙인 직함이었지만, 일단 우리 미니농장은 시작부터 웃음이라는 밑거름을 넉넉히 준 셈입니다.
내가 대충 시범을 보이기는 했지만, 정 선생은 첫 경험치고는 제법 괭이질을 꼼꼼히 하여 흙을 몽글게 다듬어 놓았습니다.
정 선생은 선배한테 묻기도 하고 때로는 인터넷도 검색하면서,
어느 샌가 상추를 비롯하여 다섯 종류나 되는 씨앗을 깔끔하게 뿌려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심란한 듯 보였지만, 곧바로 흙 맛을 알았는지 척척 알아서 했습니다.
재치가 있으니 잘 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씨앗이 제대로 뿌려졌는지 다소 꺼림칙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흙 속에 묻혔으니 알 길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뒤로 일주일간의 출장 연수를 마치고 출근하자마자 농장을 들여다보고 깜작 놀랐습니다.
계속되는 가뭄 속에서도 물주기를 열심히 했는지 제법 싹은 잘 돋았지만,
너무 밀집되어 송곳 하나 꽂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상추는 물론 다른 채소도 나고 자란 모양새가 한결같이 그러했습니다.
천생 농사꾼이 아니었으니 씨앗을 골고루 흩어 뿌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내가 직접 뿌렸다한들 별반 다를 것이 없을 터였습니다.
아마추어 농사꾼이 저지른 해프닝으로 여기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모아져 채소밭의 거름이 되었을 터이니, 이 또한 크게 잘못한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채소들은 날이 갈수록 땅 맛을 알았는지 앞 다투며 자라는데,
이웃들과 몸을 부딪치느라 몸집을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과감하게 솎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거창하게도 선택과 집중이라는 경영 마인드를 우리 학교 미니농장의 채소 가꾸기에 도입한 셈입니다.
선생님들도 짬이 날 때마다 농장을 들여다보며 풀도 뽑고 물도 주는 모습이 밝고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이렇듯 작지만 옹골진 즐거움들이 에너지가 되어 아이들에게 전이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은근한 기대이기도 합니다.
운 좋게 선택되어 자리를 보존한 채소들은 알아보게 자랐으니, 부지런히 솎아 먹어야 남은 채소들이 또 힘을 받을 것입니다.
쉬는 시간에 교장실에서 내다보니 젊은 여선생님 둘이 미미농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오순도순 웃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들이 처음 솎은 상추, 치커리, 쑥갓에 웃음꽃까지 곁들인 채소 바구니가 드디어 점심 식탁에 올라왔습니다.
야들야들한 상추에 씁쓰레한 쑥갓과 치커리를 겹쳐놓고 밥 한 술을 얹었습니다.
거기다 살림 잘 하기로 소문난 채 선생님이 직접 담근 된장을 살포시 올려놓으니, 무공해 웰빙 상추쌈이 완성되었습니다.
입이 터져라 한 입씩 채운 선생님들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하찮은 상추 한 잎에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처음 열린 고추가 약도 차기 전에 점심 식탁에 올라왔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선생님 한 분이 성급하게 수확한 탓에 비릿한 풋내가 가시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맛있다고 한 마디씩 거들며 먹는 걸 보면, 고추 맛보다 함께 먹는 맛이 여간 아닌 듯합니다.
고추는 약이 차야 제 맛이 날 터이니 농장의 고추가 제 구실을 할 때까지 '촉수엄금(觸手嚴禁)'을 선포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선생님 한 분이 '촉수엄금'은 당분간 손대는 것을 금한다는 뜻이라고 해석을 해주었는데도,
젊은 선생님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알 듯 말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어쨌든 학교의 미니농장에서 생산된 무공해 채소 덕분에 선생님들의 점심 식탁은 웰빙의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거기에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는 덤이 더 크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잠시나마 행복해 하는 그 덤 말입니다.
우리 학교 하찮은 미니농장엔 오늘도 정성과 웃음을 거름삼아 특별한 행복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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