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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인터뷰

       나 홀로 인터뷰

 

 희망의 키워드인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의 어느 봄날,

전주문화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인 여성시대 담당 프로듀서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선생님, 먼저 시청 소감문 입상을 축하드리고요.

   내일 시상식 전에 '여성시대' 프로그램에서 잠시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요."

  방송 인터뷰라는 말을 듣는 순간 소심한 나는 가슴부터 콩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시청 소감 공모의 입상자를 대상으로

잠시 전화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10시 20분경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화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휴대폰 전화번호를 확인했습니다.

말이 의사 타진이지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었습니다.

무슨 내용으로 준비해야 되느냐는 내 질문엔 그냥 생각한 대로만 말하면 된다면서 부담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난생 처음 방송 출연인지라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11시에 시상식이 있다는 통보를 받고, 방송국에 가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웠는데,

라디오 인터뷰를 한다니,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그것도 생방송으로…….

  이 나이에 시청 소감에 응모한 것도 괜히 했나 싶고, 인터뷰에 응한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화살은 당겨졌으니, 대비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어차피 나서는 것, 이왕이면 멋지게 해보아야지. 흔치않은 경험인데…….'

  나는 퇴근하자마자 집에 틀어박혀 첫 경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내가 응모했던 시청 소감문「 '얼쑤! 우리 가락'을 시청하고」를 다시 들춰

그 내용을 요약해보니 대충 이러했습니다.

 ……지역의 특성과 전통음악을 계승하는 데 일조하는 매우 적절한 프로그램으로 방송국의 편성 의도가 돋보인다.

바람직한 점으로는 도민의 정서에 부합하고 국악의 생활화를 지향하며, 교육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바라는 점으로는 프로그램의 참여 폭을 넓혀야 하고 지나친 회화에 흐르는 것을 경계하며,

방송 내용을 국악 교육 자료화할 가치가 있다.

끝으로 '얼쑤! 우리 가락'이 오랜 세월 동안 시청자 속에서 계속 발전하면서 국악 대중화의 일익을 담당하고,

지역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시청 소감문을 살펴보니, 진행자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변할 내용이 어느 정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질문 내용은 사전에 예고된 바도 없고 진행자 마음대로일 터이니, 내 순발력을 어떻게 가동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드디어 인터뷰 날이 밝았습니다. 인터뷰에 쓰일 휴대폰의 배터리는 어젯밤부터 충전시켜 두어서인지 묵직했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폴더가 잘 열리는 지, 통화는 잘 되는 지 예행연습도 했습니다.

시상식에 입고 내밀 옷차림도 가다듬고 목소리도 점검했습니다.

  평소에는 마이크를 거쳐 나오는 내 목소리가 아나운서 같다며 과분한 말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라디오 방송엔 어떻게 들릴 지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딸에게 방송 시각을 알려주고 녹음도 부탁해 두었습니다.

무슨 가문의 영광도 아닐 진데, 가족까지 동원하며 소란을 피운 후에서야 집을 나섰습니다.

  방송국에 가는 동안 운전 중에도 자꾸 시계로 눈이 갔습니다.

10시가 조금 넘으니 방송국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잠시 후에 전화를 할 터이니,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시내에 진입한 나는 서둘러서 안전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난 뒤, 휴대폰을 손에 꽉 쥔 채 대기 상태를 들어갔습니다.

벌써 땀으로 촉촉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쓰윽 문지르고 바짝 힘이 들어간 어깨도 늘어뜨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나 혼자만이 좁은 공간에 곧추앉아서 긴장의 끈을 꽉 잡고 있었습니다.

  '불특정다수가 이 방송을 들을 터인데, 망신은 당하지 말아야지. 화이팅!"

하면서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데,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자기최면의 덕분인지 휴대폰을 드는 순간 콩닥거리던 가슴이 가라앉고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이 교환되고 난 뒤, 진행자로부터 첫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국악에 관심이 많으신 선생님 같은데 한 가락쯤 불러 주실 수 있는지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적이나 놀랐지만, 그 순간 나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했습니다.

  "저는 평소 국악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 실기는 보잘 것이 없습니다."

  첫 번째  질문을 간신히 넘겼지만, 첫 단추를 그리 잘 꿴 것은 아닙니다.

이럴 때 한 가락 뽑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럭저럭 인터뷰는 마쳤지만, 어쩐지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답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말투가 어색하지 않았는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방송국에 당도하니 담당 프로듀서와 진행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인터뷰는 잘 했다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시상식을 마치고 수상자로서의 대접도 넉넉히 받은 뒤, 집에 들어설 때쯤 나는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빠, 고생 많이 했어요. 말씀은 잘 하시던데, 좀 천천히 할 걸 그랬어요."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딸들이 녹음해둔 테이프를 서둘러 돌려 봤습니다.

 내 목소리를 들으며 인터뷰한 것을 반추해보니 역시 기우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평소에도 긴장하면 말이 빨라지는 습성이 있었던지라 무척 신경을 썼었는데 인터뷰에 그 버릇이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진행자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답변을 하며 서두르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좀더 기다리며 차분하게 답변했더라면 말하고 싶은 것을 놓치지 않았을 터인데…….

  어쨌든 5분 동안의 첫 생방송 인터뷰는 나에게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내 목소리는 두 번 더 전파를 탔는데, 한번은 재미있는 경험으로, 또 한번은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해 가을의 일이었습니다.

학교 동료교사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방송하는 라디오 모닝쇼의 전화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도 선정이 되었습니다.

신청한 사람이 대답하고 나머지 직장 동료들이 둘러앉아 응원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나도 그 응원단 중에 끼어 구호도 외치고 함성도 질렀습니다.

비록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섞여 나간 하찮은 출연(?)이었지만, 잠시 웃고 즐기는 마음 편한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3년 후, 신설 학교인 시내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

JTV전주방송의 예고 없는 취재로 내 목소리는 세 번째 전파를 탔습니다.

당시는 개교 초기라 교문 앞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민원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기자가 찾아와, 통학로의 교통안전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그 답변을 교감인 내가 했습니다.

  퇴근하여 저녁 뉴스에 보니 화면과 함께 인터뷰 음성이 나오는데, 내 목소리가 분명했습니다.

이번엔 말의 속도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목소리가 경직되어 있는 것은 여전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인터뷰 당시 기자가 교장실 탁자 위에 카메라를 내려놓았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얼굴은 안 나오고 음성만 녹음하는 방법이었던 가 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얼굴 없이 음성만 잠시 내보내다니, 생각해보면 찜찜한 텔레비전 전파 타기였습니다.

 

  어쨌든 방송이라는 매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특히 나처럼 방송에 낯 설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자세로 말을 술술 잘 할 수 있는 지 참으로 부럽습니다.

타고나기도 했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치열한 자기관리를 했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00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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