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없는 한나절
동창생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정읍에서 금산사로 향하는 길.
호주머니를 만져보니 있어야 할 휴대폰이 잡히지 않습니다. 이미 절반 넘어 달려온지라,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휴대폰 없는 한나절을 체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전주 친구들한테 건망증이라는 놀림을 듣지 않으려면 일부러 두고 왔다고 둘러내야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착상입니다.
약속 한 시각에 주차장에 도착하니, 마침 휴일이라 그런지 차들이 꽉 들어찼습니다. 상가 주변도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휴대폰 한 방이면 친구들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그러나 일이 꼬이려고 그런지, 자세한 장소를 약속하지 않았던 것이 또 하나의 화근으로 작용했습니다.
주차장과 사찰 매표소 입구를 서너 차례 오가며 두리번거렸으나, 친구들은 눈에 띠지 않습니다.
휴대폰의 전화부에 의지하고 지내왔던 터라 내 기억 창고에는 전화번호는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니 낯모르는 사람한테 전화 좀 빌려달라고 사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연락할 방도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서서히 불안감이 고조되어 가더니 이내 공황 상태로 접어드는 기분이었습니다.
친구들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동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공중전화와 동전 다섯 개에 마지막 기대를 걸기로 했습니다.
주자장과 상가를 한 바퀴 더 돈 뒤에야 겨우 공중전화를 찾아냈습니다.
친구 중에 한 명을 선정한 뒤 114로부터 집 전화번호를 안내받아 연결이 되면, 가족한테 휴대폰 번호를 물어볼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동명이인이 여러 명 아니어야 하고,
그 시각에 친구의 가족이 집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첫 번째로 특이한 친구 이름을 요청했더니, 전주 지역에 같은 이름이 여덟 명이라는 것입니다.
잘못 꿴 첫 단추 때문에 엇나가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천신만고 끝에 세 번째 친구 집에 전화가 연결되었습니다.
겨우 휴대폰 번호를 알아낸 덕에 무려 한 시간 반 만에 친구들과 상봉했습니다.
친구들은 내가 찾아다니던 동선 밖에 있는 구석진 가게에서 막걸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짜증은 내가 먼저 내야 할 텐데, 오히려 친구들의 항의가 쏟아졌습니다.
왜 휴대폰을 안 받느냐며, 통화를 시도한 기록의 증거들을 들이밀었습니다.
전말을 듣고서야 상황은 수습되고 허탈한 웃음이 터졌습니다. 나로 인해 금산사 경내 산책 등 스케줄은 대폭 조정되었지만…….
휴대폰 없는 한나절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생각조차 헝클어진 작은 재앙이었습니다.
그 동안 전자기기에 끌려 다녔던 내 꼴이 우스울 따름입니다.
- 2012. 5.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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