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세워져 있는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관'은 이곳이 유서깊은 항일의 터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004년에 만들어진 기념관의 다른 시설들과는 달리 연륜이 묻어 있는 작은 비에 내 눈이 멈추는 연유가 있습니다.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 기념비', 그 비가 유별난 이유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반추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기념비는 지금 자리가 아닌 도로 건너 맞은 편에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50여년 전 나는 인근에 있는 영원국민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으며,
선생님을 따라 기념비를 세울 터를 닦는 일에 한몫 거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니 돌이나 잡초를 줍는 정도였겠지요.
백정기 의사는 왜놈들의 군함을 폭파시킨 애국자라는 것과
소년 시절을 우리 고장에서 보냈다는 것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지식의 전부였습니다.
곧 있을 제막식 날엔 서울에서 높은 사람도 오고, 부근 논바닥에 자동차가 수없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당시의 시골에선 대단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되니, 6학년 언니들만 행사에 참석하고
3학년인 우리들은 교실 안에 갇혀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서운하고 애통했지만, 몇 날이 지난 후에야 그 자리에 가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도 기념관 옆을 지날 때면, 당시의 일들이 어렴풋이나마 되살아나곤 합니다.
- 2010. 9. 20 -
* 아래는 구파 백정기 의사 전기(조광해 집필)에 실린 당시 제막식의 사진입니다. 난 어리다는 이유로 저 많은 사람들 중에 끼지 못하고, 교실 안에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지요.
(1956년 제막식 모습/천으로 가려진 기념비)
(기념관이 세워지면서 옮겨진 비)
(영원면 은선리에 지라잡고 있는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관)
* 구파(鷗波)백정기의사(白貞基義士)/1986~1934
구파 백정기 의사는 이봉창, 윤봉길과 더불어 항일 3의사 중의 한 분으로,
부안에서 태어나 7세되던 1902년 정읍시 영원면 갈선 마을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있은 후 감은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인천으로 가 일본인 시설에 대한 파괴활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만주 봉천(지금 심양)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음해 본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23년 여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자유노동에 종사하며 노동관계서적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해 9월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고,
1930년에는 북마주로 들어가 재북만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함께
자유혁명자연맹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그 리고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여
천지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군 수송선을 폭파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상해 공동조계 무창로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에서 일본정객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 받고 일본 나가사끼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조국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4년 6월 5일 39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백정기의사의 묘는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의 의사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4년 6월 5일에는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 부락에 백정기의사 기념관이 조성되어 그분의 얼을 기리며 산교육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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