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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추억/*********중반기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하는데…

         느슨함으로 화를 부르다.


  서울올림픽을 1년여 앞두고 온 나라가 막바지 준비로 올인 하고 있을 즈음,

우리학교는 개교 6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람 나이 예순이면 회갑이라 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고 축하하듯,

학교 나이 육십도 학교나 동문들은 자부심을 갖고 추진하는 큰 행사였습니다.

  동문회원들은 이미 1년 전부터 총동문회를 정비하고 기금을 모으는 등 행사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학교는 개교기념일에 맞춰 주민과 동문들에게

학교의 모습과 교육활동을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큰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교무주임으로서 개교 60주년 행사의 기획 및 추진을 맡으면서 아이들 수업하랴 행사 준비하랴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거기다 행사일이 가까워 오면서 심한 감기까지 걸려 연일 심신이 개운치 못했습니다.

  과로까지 겹쳐서인지 감기의 끝자락은 보이지 않고 컨디션은 바닥을 기고 있었습니다.

나쁜 컨디션은 행사의 아이디어 생성과 관련 자료 제작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행사 당일에는 출근하면서부터 고열과 한기가 오락가락하며

나를 괴롭혔지만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나는 기념식의 사회를 끝으로,

이후의 행사는 물론 우리 반 아이들도 챙기지 못하고 종합병원으로 직행하여 곧바로 입원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입원하여, 예상대로 폐렴이라는 진단을 받고 침대에 몸을 부렸습니다.

전에도 아픈 치레야 가끔 했었지만 처음으로 환자복에 링거를 꽂고

침대에 누우니 완전한 환자로서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드넓은 운동장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있는 교실 대신 비좁은 병실에 갇히고 나니,

갑작스럽게 답답해진 환경이 나를 더욱 초라하고 한심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평소에도 호흡기가 허약하여 감기에 걸리면 다른 사람보다 오래 머무른 뒤에야 물러났으며,

심하면 기관지염이나 폐렴으로 악화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 병실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며 가장 먼저 원망한 것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내 탓이 제일 컸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함도 많았지만, 아무런 말없이 남겨두고 온 우리 반 아이들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입원한 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열은 내리지 않고 병세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검사를 한 뒤에야 담당의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늑막염이라는 검사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첫 입원의 처음 이틀은 어설픈 의사의 오진으로 인하여 설상가상의 시달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후로 주사와 약이 달라졌으며, 그제야 몸도 기분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건강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험한 나는 20여 일만에 퇴원하여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입원해 있을 동안 의사의 경고로 20년 가까이 피웠던 담배를 끊게 되었으니,

금연이라는 의미 있는 소득도 함께 얻었습니다.

담당의사가 던진 경고가 너무도 강력했던 탓으로 내 의지도 덩달아 단호해졌습니다.

그 결과로 금연에는 성공했으나 술은 달랐습니다.

지인들을 이해시키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긴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부터 조금씩 입을 대던 술이 제자리를 잡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내 음주 자제의 한계는 약 1년 반 동안이었던 가 봅니다.


  그 후에도 환절기마다 감기는 수시로 나를 괴롭혔으며, 그 때마다 단골병원에는 나의 진찰 기록이 쌓여갔습니다.

 "감기를 왜 약으로만 잡으려 해요? 몸 상하게……."

  그때마다 아내는 도라지, 모과, 생강 등을 달여 주며, 걸핏하면 병원을 찾는 나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아내의 말이 백번 옳았습니다. 감기약의 부작용에 시달리면서도 이겨내기에 앞서,

감기 앞에 미리 무릎을 꿇고 병원을 찾곤 했던 것입니다.

  나는 타고난 허약 체질만 탓하며 평소에 건강관리에 무심했던 일에 대해 자탄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큰 병에 대한 충격을 겪지 않아서인지 나약한 의지력 때문인지 생활 방식을 고치는 데에는 소홀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 겨울에 나는 또 한번의 긴 고생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말았습니다.

충북에 있는 교원대학교에서 30여 일 동안의 교장자격연수를 받게 되어 있어

미리부터 각별히 주의하고 조절했으나, 덜컥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객지로 떠나기 전에 나아야한다는 조급함으로 미리 감기약을 먹으며 열심히 치료했으나,

호전되기는커녕 연수 개시 3일 전에는 급기야 기관지염으로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왔으며 숙소 환경도 극히 열악했기 때문에

연수 기간 내내 최악의 컨디션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주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휴강이라 집에 내려올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첫 주의 연수를 마치고 집에 내려오자마자 생애 두 번째 입원 치료를 한 뒤,

3일 만에 퇴원하여 다시 교원대학교연수원으로 올라갔습니다.

덕분에 최악의 상태는 벗어났으나, 연수 기간 내내 어중간한 컨디션으로 고전 끝에 마침내 수료를 했습니다.

나도 한 달여 동안 고생을 많이 했지만, 가장의 불안한 객지 생활 때문에 가족들도 한 달 내내 불안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허약한 몸이 마음조차 나약하게 만들고,

나약한 마음이 결국 몸을 더 크게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이 제일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깨우치고 난 뒤부터는

학교 일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속도를 조절하려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나의 건강을 위해 당장 챙겨야 할 것은 꾸준한 운동이오,

버려야 할 것은 미루는 타성과 끈기의 부족 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그때 겨울의 고생을 생각하며, 몸이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지 못한 나의 미적지근함을 채찍질하곤 합니다.


                             ≡ 1987년, 2005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