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단의 추억/*********중반기

단 한번의 어루만짐으로

        단 한번의 어루만짐으로

 

'오늘은 정수의 입을 기어코 열어보리라.'

  앞으로 정수의 말문을 열어주지 못한다면, 나의 숙제는 미결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내가 기대한 일을 모두 잘 마친다 해도 말입니다.

  정수는 고아원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사랑의 결핍을 응어리로 안은 채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주위의 차가운 시선들은 그를 위축시키고 자신감마저 앗아 갔습니다.

  정수는 4학년이 된지 한 달이 다 되었는데도 종일 입을 다물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공부시간에는 더욱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정수에게 아무것도 베풀어준 것이 없는 나에게서 정수는 또 한번의 차가움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정수의 그런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정수 자신도 자기는 늘 그러고 있어야만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아이라도 그늘 속에 남아 움츠리고 있다면, 그곳은 진정한 의미의 교실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대로 학년을 마친다면, 나의 교육과 학급경영은 결코 성공한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저런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정수를 끌어안기 위한 한 가지를 방책을 구상하여 이의 실천에 착수했습니다.

정수도 학급의 일원이라는 것과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첫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정수를 따로 불러서 아주 짧은 동시 한 편을 쪽지에 적어 주었습니다.

 "정수야, 넌 이것을 충분히 외울 수 있을 거야.

  5교시에  친구들 앞에서 한번 외워보도록 하자. 응?"

  불과 넉 줄짜리 동시인지라 별로 싫지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정수는 쉬는 시간마다 일을 딸싹거리며 열심히 외우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관심에 작은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무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과도한 과제를 준 것은 내 작전의 일환이었습니다.

5교시가 시작되기 10분 전에서야 국어 책에 나오지 않는 동시 한 편씩을 골라 외워두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외울 시간이 너무 짧다고 불평하면서도, 동시를 찾아 외우느라 도서코너에 모여 법석을 떨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일을 해내지 못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재촉을 했습니다.

  5교시가 시작되자마자, 이미 약속한대로 한 사람씩 일어서서 외워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짧았던지라 제대로 외우는 아이가 많을 리가 없었습니다.

더듬거리거나 머리를 긁적이며 포기하는 아이들이 속출했습니다.

내 작전이 서서히 맞아 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아이들이 그걸 눈치 챌 리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정수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정수야! 일어서서 외워볼까?"

  정수는 무겁게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거침없이 외워 내려갔습니다.

 "별님. 밤새 별님이 울었나? 초록빛 잎사귀엔 하얀 진주알,

  별님의 눈물은 곱기만 하다."

  드디어 정 수의 말문이 열렸습니다. 그것도 또박또박 줄줄 외우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저마다 놀란 얼굴로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나는 정수를 꽉 안아주며, 그의 까칠까칠한 머리를 몇 번이고 뜨겁게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해내지 못한 것을 우리 정수가 훌륭히 해냈습니다.

  선생님도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은 또 한번 정수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정수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지만, 그것은 그의 되살아난 생기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정수는 수업 중 질문에 곧잘 손을 들게 되었으며, 나는 그 때를 놓칠 세라 정수를 지명해주곤 했습니다.

이제 정수를 보는 아이들의 눈이 달라졌고, 그의 주위에는 말동무도 하나 둘씩 늘어갔습니다.

  지금도 달라진 정수를 생각하면, 그 때의 단 한 번의 어루만짐을 좀 더 일찍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 1985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