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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추억/*********중반기

제자의 아들을 제자로 맞으며

       제자의 아들을 제자로 맞으며


  초임 시절을 보냈던 정읍신풍국민학교에만 세 번째 발령을 받았으니 흔하지 않은 인연인가 봅니다.

두 번째 근무 이후 20여 년이 흘러서인지,

학교의 모습도 많이 변하고 학생수도 크게 줄어 초임 때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나는 교직 생활에 발을 디딘 이후,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1학년을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저학년 담임의 경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1학년이 가장 어렵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학교 여건상 어쩔 수 없다는데,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학년이 맡겨지든 크게 걱정이 없었는데,

1학년을 처음 맡고 보니 첫날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에 깜깜하고 어깨도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받아놓은 밥상을 물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첫 단추를 잘 꿰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에게 믿음을 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 선결 과제였습니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생각한 끝에 한 가지 방책을 마련했습니다.

  입학식을 마친 후 교실에 들어오자,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티 없이 맑은 모습들로 채워진 교실은 순수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들 뒤로 서 있는 20여 명의 학부모들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1학년을 처음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생각한 것들을 풀어놓았습니다.

 "제 막내 아이도 오늘 이 시각쯤 학교에 입학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1학년을 처음 맡게 되어 많이 서툴지만,  이 아이들을 오늘 입학한 제 아들딸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학부모들은 빙그레 웃음 지으며 신뢰를 표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나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학급의 경영 방침을 일사천리로 설명했습니다. 어쨌든 첫 단추는 제대로 꿰어진 셈이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고학년에 익숙했던 옷을 바꿔 입기가 그리 쉽지 않아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학습 지도 자료도 열심히 뒤적이고 선배들의 조언도 들으며 1학년 지도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1학년 아이들의 심리를 파악하게 되고

의사소통도 점차 원활해져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의 비결은 의외로 쉬운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 선생, 1학년 학생이 다 됐네 그려."

  선배 선생님들이 간혹 던지는 말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 망가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의도적으로 1학년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 눈에는 내가 선생님이자 친구로 보이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의 판단이 어느 정도 적중했는지 아이들은 나를 따르게 되고 나도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이었습니다.

거무스레한 얼굴에 자그마한 체구의 청년 한 사람이 교실에 찾아와 꾸뻑 고개를 숙였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용민이 아빠입니다. 애 엄마한테 선생님 이야기 들었습니다."

  나는 우선 인사를 받으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반갑습니다. 담임 문경근입니다."

  용민이 아버지는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씀 놓으십시오. 선생님! 저 경산에 사는 선생님 제자 김인철입니다."

  지금부터 22년 전인 초임 시절에 6학년을 맡았을 때의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착해 보이는 모습에 똥그란 두 눈은 어릴 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키가 작아서 늘 앞자리에 앉았던 그 아이는 이제는 30대 중반의 어엿한 청년 농사꾼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제자의 아들을 다시 제자로 두게 된 나는,

한동안은 용민이를 보면 아버지의 어릴 때 얼굴이 겹쳐오기도 했습니다.

  "내가 벌써 이만큼 달려왔나?"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이 흘렀건만 초임 시절이 바로 엊그제인 듯,

그 때 그 아이들의 모습이 선명한 영상이 되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용케도 견디며 아침이면 어김없이 교실에 들어섰던 그 아이들,

농번기 때면 단단히 어른 한몫을 하며 들녘으로 나섰던 그 아이들,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미리 포기했던 몇 아이들,

그러면서도 들꽃처럼 순박함을 잃지 않았던 그 아이들…….

 '지금쯤 그 시절 그 아이들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제자의 아들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이런 생각을 간간이 떠올리며, 그 시절을 반추해보기도 했습니다.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