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초등학교에서는 9월이 되면, 어린이회 등 2학기의 학급 조직을 다시 정비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시절을 반추하노라면 누구나 어린이회에 대한 기억을 한두 가지쯤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회는 소위 똑똑한 아이들의 입씨름 장이 되기도 했었지만, 제법 그럴듯한 건의사항이 나와 학교 측에 전달되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어린이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다음 주에 지킬 주훈(요즘은 주생활목표라 함)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 국민학교 시절에 등장했던 몇 가지 주훈을 살펴보면 당시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반추할 수 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결석을 하지 말자.', 풋과일을 따먹지 말자.', '남의 신발을 훔치지 말자.' 등은 그 시절의 힘겨웠던 생활을 반영하는 대표적 주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면 부지깽이도 덤빈다.'했으니, 고학년 아이들은 농번기가 되면 집에서 어른들을 도우며 한몫 단단히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창 바쁠 때면 아이들의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었으며, 결석하는 아이들의 수가 점차 늘다보면 수업이 불가능할 정도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때맞춰 어린이회 시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주훈이 '결석을 하지 말자.'였으니, 농촌의 아이들은 절기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학교마다 농번기 방학으로 접어드는 것이 자연스런 순서였습니다. 요즘은 '결석을 하지 말자.'라는 주훈도 볼 수 없거니와 결석하는 학생이 극히 적어 학년말이면 거의 다 개근상을 손에 쥐게 되니,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시절 어린이회 시간에 한번쯤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훈은 '풋과일을 따먹지 말자.' 였습니다. 당시엔 보리밥 도시락 몇 숟갈로 대충 점심을 때운 아이들의 하굣길은 허기지고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과수원 옆을 지날 때면 채 익지도 않은 풋사과의 유혹을 견디기 쉽지 않았습니다. 대담한 아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한 두 개 쯤 손에 쥐어보지만, 주인의 호통에 혼쭐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계절 따라 풋보리, 무, 고구마, 풋사과 등이 하굣길 배고픈 아이들의 공략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선생님들의 질책에 떨어졌으며, 아이들은 '풋과일을 따먹지 말자.'를 주훈으로 내걸고 자정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가난의 증표 중 하나는 맨발 등교였습니다.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부모의 가난을 몸으로 때우며 견뎠습니다. 겨우 명절 때나 얻어 신었던 고무신을 행여 분실하기라도 하면, 부모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는 것은 물론 한동안 부끄럽고 슬픈 맨발 등교로 이어졌습니다. 그 신발을 슬쩍했던 아이도 드러내놓고 제대로 신어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졸였으니, 이는 모두 가난 탓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주훈이 '남의 신발을 훔치지 말자.'였으니, 이는 삶의 애환이 아이들의 눈에 투영된 것이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요즘도 학교에서 신발을 분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본인의 실수나 상대방을 골탕 먹이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하니, 그 배경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초등학교에 자주 등장하는 주훈을 들여다보면, 예전과는 그 내용이 많이 달라졌으나 사회 현상을 반영한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따돌림을 하지 말자.', '자연을 사랑하자.' '질서를 지키자.', '에너지를 아끼자.' 등 요즘 어린이들 입을 통해서 등장하는 주훈은 매우 다양해진 것이 특징입니다. 사회현상이 그만큼 복잡다단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자.'와 '인사를 잘 하자' 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훈의 목록 속에 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최고의 주제는, 여전히 공부와 인성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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